욕심 없는 영감이 되려고
구십오 년 가을 달이 바뀌기 전에 서울에 태어났다. 이름 대면 모두가 아는 큰 병원에서 쉴 새 없이 울며 처음 공기를 맡았다. 새벽 한시 삼십오분에 옆집 사람도 다 깨울 만큼 큰 울음소리였다. 계절에 맞지 않는 비가 내렸고 천둥도 쳤다. 이름 모를 설화에 보면 좋은 징조로 쓰여 있던데, 마치 위인이 태어날 법한 연출 말이다. 특별하게 아픈 곳 없이 팔 다리 손가락 발가락 잘 달린 채로 나온 것만으로 행운이었다. 울고 있다는 건 건강하다는 의미였다. 숨을 잘 쉬고 있다는 증거였다. 물속에 있다가 살이 불어 쭈글해진 피부가 점점 펴져갔다. 그러곤 부모와 눈 맞춤을 했다. 처음이었다.
네 살 무렵 같은 곳에서 동생을 만났다. 기억하기로는 네 개의 병상과 회색의 벽,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그려진 병실에서 엄마와 함께 누워있었다. 비로소 넷이 된 가족이었다. 추운 방에서 우리만큼 울며 밖으로 나왔을 테니 지금은 기운이 없을만하겠다. 만남이라는 게 예상하지 못할 시절에 찾아오는 거였다. 두 사람 품에 있는 우리 둘은 서로에게 축복이었다.
십 대에는 여느 아이들과 같았다. 두 사람은 맞벌이를 나갔다. 일상은 학교 학원 집이었다. 특히 피아노 학원에 다니는 게 재밌었다. 체르니보다 하농이 좋았다. 한 번 칠 때마다 레슨 노트 속 과일 모양에 색칠했다. 영어학원은 집에서 멀기도 했고 국어도 잘 하지 못하는 마당에 외국어를 배우자니 어이가 없었다. 그나마 그곳에 가면 다른 학교를 다니는 새로운 친구들과 소통하는 게 즐거웠다. 가끔 늦장을 부려 학원 버스를 놓치게 되면 자전거를 타고 갔다. 사십 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혼자서 보내는 자유가 하교 후 먹는 떡볶이보다 행복감을 건넸다. 공사 현장을 지나갈 때면 벽돌을 하나 주워 집에 가져갔다. 4B 연필로 날짜를 적어 어딘가에 보관해뒀다. 의미 없는 물건이 어느 시점을 기억해 줄 것 같아서. 가장 철없고 그저 순수했던 시절에 숨 쉬는 법을 터득하고 웃는 일을 찾아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먹고살기 위한 재능이 아니라 정체성을 찾으려 했던 것 같다. 아쉽게도 큰 굴곡의 기억은 남아있지 않았다. 이때의 나는 한없이 어린 채 살고 싶었고 성장이 무서웠던 아이에 불과했다.
군에 있을 때는 책을 그렇게 많이 읽었다. 잡히는 대로 읽다 보니 몇 권을 읽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내용은 전부 담을 수 없지만 활자를 보는 습관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복무를 마치고 대학을 다닐 때였다. 고향은 서울, 이곳은 경상북도 김천이었다. 원하는 학과도, 가고 싶은 학교도 아니었지만 이곳에서 생활은 큰 거름이 되었다. 상관없이 다닐 수 있었던 건 당시 내가 하고 싶은 게 없어서였다. 무얼 해야 할지, 빛날 만큼 설레는 일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때였다. 타지 생활을 하면서 얻은 건 독립적인 성향과 사람을 향한 그리운 감정이었다. 혼자가 좋았지만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향이었다. 모두와 친해질 순 없었지만 지금까지도 만나고 있는 사람들과 그곳에서 얽혔다. 그것만으로 됐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만날 기회는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다. 여기서 만날 기회라는 건 나를 아는 사람과 얼마나 오래 소통하느냐의 문제다. 단지 얼굴만 보고 스쳐가는 관계가 아니라.
국가고시를 합격하고 사회의 문을 두드릴 때다. 역병이 터지며 전 세계가 뒤집혔다. 공부를 잘하고 못 하고 상관없이 모두에게 기회가 줄어들었다. 세상이 미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처음으로 원망스러웠다. 생물이 아닌 것에 탓을 돌렸더니 자신이 너무 추하고 작아졌다. 솟던 자존감은 작은 구멍이라도 있으면 찾아 들어갔고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금방 취업이 될 거라는 생각에 겨울에 산 정장은 오만한 마음의 증거였다. 여름이 되어서도 두꺼운 옷을 입고 뛰어다녔다. 흘린 땀의 무게는 어디 저울에 달지 못할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내게 찾아온 짐과 무게를 버텨야 했다. 덜어낼 생각보다 더 얹어 무릎이 낮아지도록 쌓았다. 나는 나를 혹독하게 대하고 주저앉아 포기하지 않게 했다. 스스로가 아니면 대신해 줄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약한 게 아니라 더 강해지고 싶었다. 그 해 여름 어딘가에 들어가 처음으로 월급을 받았다.
이십 대의 끝엔 방황과 두려움이 많았다. 절정에 다다르니 열기가 식어갔다. 새벽에 문틈으로 들어오는 작은 바람에 불이 꺼질 것만 같았다. 위태로운 곳엔 날씨가 항상 같았다. 같은 시간대에 일정한 빛과 물도 들어오지 않는 척박한 땅이었다. 전분을 넣은 듯 죽같이 꾸덕이는 찝찝한 기분은 잘 씻겨나가지도 않았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삼십 대에 걸맞은 사람일까. 이십 대의 나는 무얼 하며 보냈지. 이룬 게 있었나. 어떻게 보면 나는 나를 너무나도 생각했던 사람이다. 문턱은 높지 않아야 넘기 편한데 계단같이 만들어 놓았다. 그렇다고 죽을 만큼 열심히 했을까. 아쉬움과 후회가 섞여있는 방황은 수없이 노력하고 나아갔다는 의미였으면 좋겠다.
삼십이 되었다. 이십 대 절정의 걱정은 물 만난 설탕처럼 달콤하게 녹았다. 얼굴이 뜨거워질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걱정과 고민들. 무엇 때문에 그토록 힘들고 아파했을까. 지나고 보니 별거 아니었던 게 참 우스웠다. 어릴 적부터 이유에 집착하는 버릇이 있었다. 스스로에 대해 정의하고, 알아가고 단지 숨을 들이쉬고 뱉는 일에도 이유를 찾았던 사람이다. 강박과 독기는 자아가 해독했다. 중독성 강한 다그침은 나를 더 나아가게 했지만 입병처럼 한번 돋아나면 지속적인 쓰라림을 내어주었다. 자연스럽게 주름지고 말라가고, 때로는 살찌우고 도려내는 일은 인간이 가진 특권 중 하나였다. 대부분의 시절에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바보 같은 사람으로 지내왔다. 그렇다고 나쁜 게 아니었다. 모든 서사가 결국 나였고 선택한 또 하나의 권리였다.
미숙했다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때에만 집중해서 보일 수 있었던 나의 모습이었다. 최선을 다해 피워낸 나였다. 수동으로 움직여야 하고 불편하게 조작해야 하는 카메라가 있다. 나는 그런 부족한 곳에서 오는 감성이 좋더라. 정삼각형 보다 직각 삼각형, 정사각형보단 사다리꼴이 좋다. 완벽을 추구하며 지나온 길이었지만 방법은 없었다. 이유 없는 감정 기복 또한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맞이할 수 있다. 결과에 목메지 않는 욕심 없는 영감이 되고 싶다. 카메라를 자주 챙겨 다닌다. 걸어가는 과정을 다른 눈으로 담아두고 싶어서.
크고 작은 결핍은 두 다리를 움직이게 한다. 대신 보폭은 가볍고 최대한 일정하게. 그래야만 떠나지 않고 오래 머무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