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산다는 건 말야
지금을 추억과 맞바꾸는 일
살 온도가 적당히 느껴질 거리. 맞닿고 떨어질 때도 있었지만 온몸을 다해 잊지 않으려 한다. 적어도 사람의 기억이라는 건 기계처럼 입력되면 뱉는 것과는 달랐다. 숨 쉬는 걸 잊지 않으려 들숨 날숨을 의식하는 것만큼 본능과 같은 행위다. 기억은 조만간 추억이 되었다. 더해서 추억이 기억이 되는 건 지금을 사는 일이었다.
유독 살아있는 말이 좋았다. 살아있는 글, 언어, 뉘앙스, 경험이 쓰여있는 게 와닿았다. 살아가는 중일 수도, 죽었지만 살 적 기억을 더듬은 말일 수도 있지만 모조리 간직하고 싶었다. 누군가의 말은 자애를 비롯해 태어난 생물과 같고 평생을 함께 하는 신령 같은 것이었다. 직접 보고 느끼지 않아도 맴도는 활자는 시신경을 통해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았다. 사람 냄새나는 말이 좋았다. 말을 쓰는 작가는 주변과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산림엔 무수한 생명들이 모여있다. 오가는 볕도 새 울음소리도, 자연이 내린 것들은 허물없이 빛나고 있다. 발음이 비슷한 살림은 어쩌면 삶이 모여 숲을 이룬 형태라고 느껴진다. 사람과 사람이 세상에 나와 어쩌다 얽힌 게 아닌 또렷이 뭉쳐진 형태로 말이다. 또한 ‘살리다’라는 의미로도 보인다. 죽어가고 메말라 가는 가지와 몸통에, 뿌리에 내린 달콤한 물 같은 것이다. 운명이라면 그럴 수 있겠다. 세월 덕분에 당연하다고 느껴진 것들이었다. 문득 느리다 못해 정적이 찾아온 시간엔 더 이상 당연하게 걷지 못하게 될 때도 있었다. 한 편으로 미안하고 아쉬운 마음에 찾게 되는 명분일 수 있겠다. 원망과 실망 때문에 쏘아 붓는 눈빛일 수 있겠다. 시련은 운명만큼 당연하다는 듯 찾아왔지만 그럴 때마다 살려내는 건 자신의 숲속 생물들이었다.
먹고산다는 게 뭐길래. 잘 먹고 잘 사는 게 어떤 기준이길래. 이따금 잘 살다가도 돌아 보곤 웃고 우는 게 삶이라고 하는 것인가. 여생이 얼마가 되었든 시기마다 질문을 던진다. 각자 서 있는 곳이 어디든 걸어온 길과 나아갈 곳을 고민한다. 그러다 보면 작은 것도 쉽게 놓치지 않는 시선을 얻게 되었다. 사소한 행위가 행복을 불러온다면 관찰을 마다 할 이유가 없었다.
무엇이 행복이고 잘 사는 기준인지 여전히 모른다. 그나마 단정 짓는 건 이번 생의 클라이맥스는 주기적으로 찾아온다는 것이다. 절정의 물결에 심신을 맡길 뿐이었다. 평범하고 나른한 매일이 온다. 하던 대로 늘 잘하면 결과가 좋을 것이다. 평범함 속에서 얻는 특별함들이 소중하게 다가올 것이다. 예전에는 행복한 게 뭘까 생각해 봤는데 돈 많이 벌고 잘 먹고 잘 사는 게 다였다. 그런 조건들이 행복에 보탬이 되겠지만 이젠 일 순위가 아니게 되었다. 무조건 건강하기. 몸도 마음도, 그리고 별 탈 없이 하루가 지나가는 것. 감당하기 힘든 마음의 짐을 지탱해야 하는 일이 오지 않는 것.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것. 보통의 사람으로 남는 것. 지금의 우리는 행복의 전부이다.
저녁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이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 부를 노래가 있다는 것
나태주 시인의 ‘행복’이다. 적어도 살림을 하고 있는 우리는 행복하다 할 수 있지 않은가.
위로가 되는 가장 큰 힘은 안정에서 나온다. 편안을 느끼는 관계에서 더 나아간다. 단지 나와 같은 사람이, 혹은 비슷한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큰 위로가 될 때가 있다. 한 가지 이유만으로 혼자에서 ‘함께’ 가 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