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일기
12.13
눈의 도시로 간다. 삿포로역에서 기차를 타고 사십 분을 지나왔다. 노란색 출입문에 달린 작은 창밖으로 제니바코 바다가 보인다. 푸른 겨울 파도는 힘차고 용맹하다. 김민희 작가 <삿포로 갔다가 오타루 살았죠>에 등장하는 모리노키에서 오타루의 마지막 밤을 덮는다. 무려 4박을 지내면서 주인장 마사씨와 헬퍼 마유미씨는 처음 보는 이방인에게 투박하면서 넘치는 정을 베풀었다.
호스텔 가정식 오백엔. 갓 지은 쌀밥과 양배추 샐러드, 된장국과 치킨 조림. 직접 만든 식혜가 들어간 딸기 요거트는 시그니처 메뉴였다. 조식을 먹으며 창밖을 내다본다. 20cm의 눈이 내린다. 게으른 사람은 이곳에서 못 살 것 같다. 회색 가로등, 붉은 우체통 위에 소복이 쌓인다. 건설(乾雪)이지만 꽤나 무거워 보인다. 견디느라 고생이 많겠구나. 이곳에 더 묵고 싶은 마음이다. 때로는 기억보다 장소에서 느꼈던 감정이 오래 남는다.
12.14
외국에 혼자 온 건 처음이다. 그것도 엄청 길게. 예전에는 쉬고 싶어서 도피처를 찾아 떠났다면, 이번엔 충만한 마음으로 떠나왔다. 한없이 기차 밖을 본 적이 있던가. 계란덮밥을 먹으며, 녹차를 한 모금 하고 노래를 들으며 책과 설경을 보았다. 지금의 먹먹한 감정을 잊지 않으려 애쓰는 중이었다. 서울 지하철에서 봤던 노부부 덕분에 시작된 여행. 사소한 시선과 용기를 챙겨 어디든 떠나기. 그것이 이방인의 기본이 아닐까.
고독하고 외로울 때, 혼자인 것에 집중하지 않으려 애쓴다. 비로소 진정 혼자가 되었을 때, 외로운 나는 떠나고 없었다. 내가 본 만큼만 굴러가는 세상, 그래서 더 많이 보고 듣고 이해하려 한다. 나는 자유롭다. 어쩌면 많이 행복하다.
12.15
설국. 모르는 이의 평온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폭설이 내렸다. 한없이 추운 곳. 관광을 오는. 이에겐 낭만과 추억의 나라, 어떤 주민들에겐 떠나고 싶은 곳이었다. 환경 때문에 기다림이 늘고 부지런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 불평을 뒤로하고 매일 내리는 눈을 처음 본 듯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에게 모든 행위는 삶일 텐데. 잠시 들린 이방인이 춥고 걷기 힘들다고 할 수 있을까. 그건 누군가의 삶을 감히 힘들다고 말하는 것이니까.
12.17
관계의 시작은 어려운 것.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것.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도 아니었다. 약속처럼 지키고자 애를 쓴다고 되는 것도 아니었다. 원하지 않아도 생기고 사라져 버리는 그런 것들이었다. 시작조차 어려워지기 전에 돌아가려 한다.
12.18
출국 전 손톱을 깎고 출발했는데 어느새 자라있었다. 검게 물들인 머리칼도 색이 빠져 흰 게 몇 보인다. 몸에 있는 작은 것들은 불수의적으로 변한다. 길이가 늘어지고, 색이 변하고 흐름을 그대로 보여주는 수단이었다. 덕분에 온전히 시간을 느낄 수 있다. 손톱을 깎았다. 보이지 않는 어떤 것들도 성장했길 바라면서.
12.19
귀국하고 오래 못 본 동료들을 만났다. 강아지 세 마리와 주인 셋과 남양주 아울렛에 갔다. 영하의 날씨에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무해한 아이들과 산책했다. 고작 한 달 다녀왔는데, 나의 사람이 그리웠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