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여린 마음은 여름에 가장 먼저 익는다




   변비약 전립선 약 식욕촉진제 최대로.
   19일 CM CT, lab, X-ray.
   피검사랑 심전도 검사 좀 할게요.
   추워도 금방 하니까 참으셔요.
   약이 많아서 만드는 데 오래 걸렸어요.
   퇴원할 거예요. 저 혼자 왔어요. 옷 갈아입어야 해요.
   집에 가는 길에 새마을금고 가서 통장 정리할 거예요.
   귀가 어두운 남자와 지냈다. 휴대폰 메모장을 킨다. 필담을 나눌 때도 있고 일정을 기억하려 남긴다. 많은 텍스트를 간직하고 있는데, 하나씩 정리하려 한다.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다. 해는 여전히 짧지만, 볕은 따스했다. 새해에 들어서 유독 자주 만날 기회가 생겼다. 갑작스럽게 응급실을 가야 할 일, 욕창이 생겨 소독을 해주러 가는 일. 끝내 요양병원에 입원을 시키는 일. 나는 뭐든 서투른 손자였다. 사 년 전 서울대학교 병원에 갔을 때도. 외래를 가서도, 영상의학과에서 검사를 할 때도. 진료 중 갑작스럽게 응급실에 달려갔을 때도. 휠체어를 끄는 일도. 쉬는 날을 내어 남들처럼 놀지도 못했던 날도. 걱정은 화가 되어 나타났다. 얼굴을 찌푸렸다.

   계절이 18번 지났다. 폐병이 있어 늘 쉰 목소리다. 가래를 힘겹게 뱉는 모습. 누군가에겐 쉬운 일이 그에겐 살기 위한 발버둥이다.

   그에게 시간은 어떤 의미일까. 생의 끝을 준비하는 마음은.
   알려주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는 시간이 지난다. 나의 하루는 평화롭고 무탈하고, 때로는 지겨울 정도이며 고민이라고 하는 것들은 죽음에 비하면 별거 아니었다. 그런 하루를 보낼 때 눈에 밟히는 것은 그의 시간이었다. 어느 때에 찾아가도 같은 모습으로 누워있었다. 상상만으로 시간이 밉다. 느리고 무겁게 느껴진다. 공간은 어떠한가. 거실 위 침상은 키 175cm 남자를 옥죄고 있다. 몸무게는 어느새 40kg가 안되고, 살은 뼈를 덮기 위한 용도일 뿐이었다. 남자는 지루함을 느끼고 있을까. 두려울까. 주마등을 보며 지나고 있을까.
   그날은 직장 회식이 있었다. 가기 전 교육을 듣다가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엄마에게 바로 연락을 했다. 전화가 왔는데, 나는 못 받을 것 같다고 했다. 참 신기하게도 그런 순간은 변수가 없다. 나는 그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삼월 이십 육일에 그와 작별했다. 예상은 했지만 예상하지 못한 날이었다. 고민 끝에 입원한 요양 병원에서 하루 만에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울지 않으셨다. 부모님도, 나도 울지 않았다. 상조를 부르고 대기실에서 기약 없이 기다렸다. 남자는 생전에 뼛가루를 물에 뿌려달라고 했다. 어떻게 할 거냐는 물음에 그러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냐고, 세상에서 없어지는 게 아니냐고. 그러셨다. 할머니는 그제야 눈물을 보였다. 목소리가 떨렸다.
   장례를 치른다. 주어진 삼일은 정리하기에 충분했다. 입관을 하고 나니 실감이 났다. 속이 아프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날은 오래 울었다. 그동안 모셨던 날들이 기억을 스쳤다. 고생했다는 말은 과거를 노동처럼 빗대는 것 같아서 듣기 싫었다. 그저 애썼다고 생각하고 싶다. 아버지는 술 한 모금 먹지 않았다. 눈물 없이 빈소를 지키셨다.
   성남 화장터에 갔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많다. 울다 지친 사람들은 의자에 기대 잠들어있다.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던지, 화장터도 번호표를 뽑아야 한다. 생각해 보면 참 당연한 일인데,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당연한 이별인데. 순리이고 감당해야 할 순간인데. 그토록 허무할까. 이날 아버지는 몸을 떨며 울었다. 나는 살면서 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옆에 가서 안아주고 손을 잡았다. 나는 그때의 떨림을 잊지 못한다.

   당연하다면 이토록 고통스러울 일인가. 상실은 그토록 사람을 공허하게 만들었다. 한동안은 초점 없이 살고 덥고 추운지 모를 것 같았다. 감정은 휘발된다. 그래서 이제야 직면하고 적는다. 그 과정에 한 번 더 생각하고 인사한다. 문자 보내는 법을 가르쳐 드리길 잘 했다. 카메라도 사길 잘 했다. 오고 간 문자와 사진을 본다. 무더운 여름은 하얀 눈이 내리던 날을 곱씹기에 참 좋은 시기다. 닿으면 녹고 사라질 것들이지만 더운 마음을 진정시키기에 알맞다.
   경칩도 지났는데 화장 중 함박눈이 내렸다.
   하얀 이불 덮고 떠난 남자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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