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는 일방적으로 짓지 않는다
계절을 겪고 있노라면. 하염없이 흐르는 시간을 털을 세우고 느낀다. 여름이 지나고 있다. 과거 이맘때와 다른 점은 나란히 걷고 있다는 것. 살을 부딪힌다. 미세한 땀이 오간다. 유난히 습한 덕분에 끈적한 상태로 잘 붙어있다. 손가락은 겹치고 발은 같게. 향하는 방향과 시선도 같다. 가끔 옆을 볼 때면 싱그러운 눈웃음을 짓고. 익살스럽게 웃는다. 하얀 이가 살짝 보이며 광대가 올라간다. 눈은 풀릴 만큼 황홀하고 생각은 멈춘듯했다.
음식을 매번 같게 먹어도 상관없다. 맛은 잘 기억나지 않으니까. 맛있다 달다 맵다 정도의 수준. 무얼 먹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마주 보고 음식을 먹는 게 좋았다. 반복되는 백화점에 가는 것도 상관없다. 볼거리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란히 걷는 게 좋았다. 차를 타고 이동할 때 음악을 트는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백색 가로등 사이로 밤 한강을 지나며 이어진 기분이 좋았다. 다리는 일방적으로 짓지 않는다. 다른 한쪽에서 시작되어 결국 연결된다. 길이에 상관없이 끝내 붙게 된다. 인연은 그런 것이다.
어느 날 능소화를 보여줬다. 담장에서 자라고 장마를 견디는 꽃. 예쁜 색을 가진 꽃은 서울 곳곳에 피었다. 우연히 볼 때면 어 능소화가 피었네 하며 꽃 닮은 웃음을 비추었다. 잎과 색은 없지만 자체로 예쁜 모습. 한때를 피었다 질 것도 아니라 다행이다. 점점 그런 게 늘어간다. 루틴이 생긴다. 꾸준하게 자리 잡는 것들이. 지루하고 식상한 것들이 아니다. 묘하게 새롭고 특별한 것들이다. 그럴 때면 옥상의 별을 보는 듯했다. 어두운 도화지에 하얗게 박힌 점. 오늘은 더 밝게 느껴졌다. 어제보다 불어난 마음이라는 증거다. 그러니까 너희에게 구걸하고 싶다. 시간을, 무한에 가까운 영원을, 감당할 수 있는 시련을, 엇갈리지 않을 정도의 변화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