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보리의 이불이다



   눈은 보리의 이불이다
   빛 한 점 머물지 않는 새벽
   이슬이 먼저 얼어 별처럼 박힌다
​
   깡깡한 땅 아래로 숨이 길게 내려가고
   흙은 무쇠처럼 잠들어 있다가 느리게 녹아 작은 틈 하나를 만든다
​
   물러진 흙 틈 사이로
   어디선가 봄의 기척이 스며드는 밤
   아무도 듣지 못한 낯선 숨결이
   흙알 사이를 지나간다
​
   겨울은 늘
   바람의 손등을 닮은 표정으로 오고
   먼 데서부터 모래를 털어내듯 눈을 들판 위에 흩뿌린다
​
   그렇다
   언제부턴가 그런 저녁 빛을 닮았다
   부서진 먼지들이 마음속에서 자꾸 일어
   어디에도 발 디딜 곳이 없어진 날들
   잘 다져놓았다 믿던 자리마저
   얇게 얼어 울음을 감추는 날들
​
   보리는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 것이 가장 멀리 가는 방식인 듯
   하나의 꽃조차 내지 않은 채
   하얀 이불 아래서 긴 꿈을 꾼다
​
   그럴 때가 있다
   가장 단단해 보이던 마음이
   어느 날 갑자기 서걱대는 소리를 내며 갈라질 때,
   그 틈 사이로 작은 조약돌이 굴러 들어올 때,
   들판처럼 누워 온몸으로 겨울을 받아낸다
​
   쌓일수록 희미한 체온을 만든다
   차갑고, 또 차가운 것들이
   서로에게 등을 기대며
   서서히 온기를 나누고있다
​
   보이지 않는 눈발이 내리는 중일지 모른다
   얼어붙지 않도록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려앉는 중일지 모른다
​
   당장 꽃이 피지 않아도 좋다
   빛이 들어오지 않아도 좋다
   눈 아래에서는 늘 보이지 않게 무언가 자라고 있으니까
​
   가라앉는 것 같은 순간에도 흙 속에서는 작은 열이 모인다
   어둠 아래, 깊은 어둠 아래
   새순은 처음 몸을 기울인다
​
   입김 하나로 녹아내린 얼음 틈 사이로 봄이 조용히 스며든다
​
   너의 계절도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자라고 있다
​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