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回歸
여행이란 참 신기한 것 같습니다.
풍경을 바꾸러 떠난 곳에서, 결국 나 자신을 바꿔서 돌아오잖아요.
어쩌면 여행이란, 우리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조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입니다.
우리의 사유를 넓혀주고 감각을 자극하는 그런 조각들 말입니다.
단 한 번 여행을 떠난 것뿐인데 이토록 지금까지 끝나지 않는 여행도 있는 거라고.
문득 고개를 들어봅니다. 나의 계절은 여전히 겨울의 어느 지점에 멈춰 서 있습니다. 달력은 쉼 없이 넘어가고 공기의 온도는 수차례 변했으나, 두발의 좌표는 여전히 일본의 낯선 골목, 두터운 적설(積雪) 아래 머물러 있는 것만 같습니다.
침묵과 백색의 고립, 정적의 미학. 한국이라는 익숙한 풍경에서 벗어나 철저한 이방인이 되기를 자처했습니다. 곁에는 오직 카메라 한 대뿐이었습니다. 타인과 섞이지 않은 채, 입안에 거미줄이 내려앉을 만큼 긴 침묵을 유지했습니다. 자발적 고립 속에서 유일하게 나를 압도했던 건, 세상의 소음을 삼켜버린 눈(雪)이었습니다. 내뱉지 못한 말들은 안으로 굽어들어 깊이를 더했고, 뷰 파인더를 통해 바라본 세상은 차갑고도 투명했습니다. 그저 셔터를 누르는 건조한 파열음만이 들려올 뿐이었습니다.
망각에 저항하는 비정형의 기록을 마주합니다. 손바닥 위 매끄러운 액정 속을 유영해 봅니다. 라이트룸, 인스타그램 피드 속에 잠들어 있던 편린들 말입니다. 빛으로 그린 그림을 보았습니다. 그날의 차가운 대기와 냄새가 입체적으로 피어오릅니다. 0과 1로 환원된 비물질적 데이터가 기억의 지층을 건드려, 잠들어 있던 추위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수집하는 이유일 테지요.
나의 기록은 결코 유려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흔들린 초점으로, 종이에는 갈겨쓴 악필로 남겨집니다. 기록을 멈추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속절없이 휘발되는 시간의 팔짱을 꽉 붙잡고 싶었습니다. 인간의 가냘프지만 숭고한 저항입니다. 흘러가는 시간을 온전히 소유하려는 정직한 욕망을 품고 있습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문장 속에, 정제된 활자가 담아내지 못하는 호흡과 떨림이 선명히 곁들어 있습니다.
어제라는 신화, 오늘이라는 축복. 종종 '특정 순간'이라는 환상에 지나치게 목을 매며 살아갑니다. 지나갈 순간에 대한 두려움과 아쉬움 탓에, 정작 지금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최선을 다하지 못한 일은 훗날 후회를 낳았습니다. 별거 아닌 때의 한 조각이, 빛난다고 착각하여 현재를 져버렸습니다. 그것은 매 순간을 소홀히 하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쉬워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다시 겪지 못하면 어때 혹은, 언젠가 다시 돌아오면 되지라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이어가며 깨닫습니다. 그토록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겨울은, 정말이지 묵묵히 흘러가는 일상이었다는 사실을요.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씁니다. 아무것도 아닌 날의 비루함을, 서툰 글씨와 투박한 시선으로 적어 내려갑니다. 오늘의 공기, 적막, 풍경이 언젠가 또 다른 겨울이 되어 지탱해 주겠지요.
기록은,
추억하기 위함이 아니라
비로소 살아가기 위한 부드러운 수행(修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