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의 아쉬움은
올해의 기대가 되길 바랍니다
지난 겨울 호스텔 모리노키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김민희 작가의 《삿포로 갔다가 오타루 살았죠》를 읽고 고민 없이 예약했고, 영화 <윤희에게>의 잔상을 좇아 당도한 곳이었습니다. 주인장 마사 씨와 헬퍼 마유미 씨는 낯선 이방인에게 투박하지만 넘치는 온기를 나눠주었습니다.
마지막 날 아침, 창밖에는 20cm가 넘는 눈이 쌓여갔습니다. 가로등이며 붉은 우체통이며, 제 몸보다 무거운 눈을이고 서 있습니다. 무게를 견디느라 참 고생이 많겠구나. 매일 같이 넉가래를 밀며 눈을 치우는 사람들. 게으른 사람은 결코 이곳에서 배겨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조식을 먹으며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데, 이상하게도 더 머물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때로는 구체적인 기억보다 장소에서 느꼈던 감정이 오래, 더 짙게 남는 법이니까요.
영하에 흰 꽃잎이 내리고 있습니다. 새해의 미명은 차갑고도 투명합니다. 저마다 마음을 새로 벼리려는 의지가 공기 중에 팽팽하지만, 쏟아지는 다짐 앞에서 도리어 침묵을 택합니다. 그곳의 눈을 치우는 사람들처럼, 꾸준하기란 말로 포장하기보다 그저 묵묵히 행함으로써 증명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필연적으로 마주할 ‘상실’에 대해 생각합니다. 잃은 뒤에 오는 감정을 흔히 슬픔이라 부르지만, 내면의 심연을 정직하게 응시하면 가장 먼저 도달하는 건 ‘화’입니다. 예고 없는 부재에 대한 저항, 박탈당한 마음의 억울함 같은 것들이지요. 슬픔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이라면 화는 불처럼 날카롭게 솟구쳤습니다.
누군가를 두고 ‘감정의 기복이 적다’고 말하는 건, 단순히 성정이 무던하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눈의 무게를 견디는 가로등처럼, 마음속에서 치솟는 불꽃을 가만히 다독일 줄 아는 사람. 그러니까 고요하고 단단한 인격에 대한 찬사일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평정은 역설적이게도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대부분 타인의 변치 않는 모습에 체념하듯 내뱉는 말이지만, 달리 보면 불변성 이야말로 커다란 미덕이 됩니다. 태생적으로 다정하고 거짓 없는 무구함 또한 쉽사리 바래지 않는것 처럼 말이에요. 세상이 각박해져도 본연의 선함은 굳건한 상수(常數)로 남았습니다. 변하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당신을 믿고 있다는 말입니다.
믿음이라는 틀에서 초심을 다시 말했습니다. 처음의 설렘이라기보다, 폭설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이어가는 ‘지속’에 더 가까운 마음일 것입니다. 원점으로 돌아와 다시 시작하는 일. 했던 일을 묵묵히 해내는 끈기. 변하지 않는 기질과 천성처럼, 옳다고 믿는 가치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우직함이 바로 초심이 아니었을까요.
끊임없이 내리는 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적설을 견디는 일은 어쩌면, 한순간의 뜨거운 열정이 아니라 식지 않고 타오르는 지속하기의 모습입니다. 흐르는 유속에 생을 맡기며, 바위를 만나도 빗겨 흘러갔습니다. 부디 하루는 성실하게 살되, 삶 전체는 흘러가는 대로 두면 좋겠습니다.
일월이 되었는데요.
어김없이 아침에 나와 눈을 쓸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