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경 祕境



   이천오년 가을이었습니다. 백사십 센티미터가 조금 넘는 키의 초등학생. 학원 다니는 게 유행이던 그 시절 중계동 은행사거리의 영어학원에 등록했습니다. 공부는 죽기보다 싫어하면서 학원 가는 건 좋아하는, 참 모순적인 아이였지요. 그날은 늑장을 부리다 학원 버스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아껴둔 간식비로 마을버스를 탔는데, 하필이면 반대 방향이었습니다. 아이리버 전자사전에 이어폰을 꽂고 침을 흘리며 졸다 눈을 떴을 때, 차창 밖은 난생처음 보는 낯선 동네의 어둠뿐이었습니다. 버스비도, 휴대폰도 없던 아이는 눈물 콧물을 쏟으며 기사 아저씨에게 달려갔습니다. 빌린 휴대폰으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날 밤의 공기는 어린아이에게 너무나 차갑고 무거웠습니다.
   키가 좀 자란 뒤로는 버스를 잘 타지 않게 되었습니다. 차라리 걷기를 택했습니다. 버스비를 아껴 떡볶이를 사 먹는 게 더 좋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두 다리로 걷는 편이 좋았습니다. 길을 잃으면 어른에게 물으면 그만이었으니까요. 작은 눈으로 세상을 담기 시작했습니다. 직접 걷고, 보고, 바르게 뻗어 나갔습니다. 동시에 버리기 위해 걸었습니다. 두 다리는 눈과 귀가 향하는 곳으로 이끌었고, 어느새 겁과 울음은 사라져 있었습니다. 얼굴이 붉어질 만큼 창피했던 기억은 점차 옅어져, 훗날 지독하고도 애틋한 추억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십사 년 겨울, 남자는 도쿄에 도착했습니다. 거리는 빛과 사람으로 가득했습니다. 틈을 비집고 다시 걷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지하철을 타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택시도 버스도 타지 않았습니다. 어릴 적 기억 때문일까요. 왠지 모를 거부감이 들어서였습니다. 하루에 삼만 걸음, 며칠을 그렇게 꼬박 걸었습니다. 목에는 카메라를 메고 무작정 헤맸습니다. 붉은 기운이 꺼지지 않은 단풍이 환하게 예쁜 길, 양옆으로 펼쳐진 플라타너스, 북적이는 도심 사이로 보이는 고즈넉한 신사. 울창한 활엽수림의 서늘한 그늘은 흐르는 땀을 식혀주었습니다. 질서 정연하게 걷는 사람들의 뒤를 쫓다 보면 볶은 원두 향이 코끝을 맴돌았습니다. 도쿄의 겨울 해는 참 일찍 저물더군요. 오후 네 시 반, 손이 시려 입김을 불며 들어간 카페에서 따뜻한 드립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역시나 정해진 다음 목적지는 없습니다.
   사실 출국 전날 밤에는 잠을 설칠 만큼 두려웠습니다. 일본어를 전혀 못 하는 남자는, 식당에서 "아리가토"라는 말만 소심하게 뱉을 뿐이었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수고하세요", "추천해 주실 수 있나요" 같은 다정한 말들을 건네고 싶어서, 파파고를 켜 몇 번 연습해 보았습니다. 남자는 막상 사람 앞에 서면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답답한 건 서로 마찬가지였겠지요. 처음 마주한 이방인은 버벅대며 "아... 어..."만 하고 있었으니까요.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습니다. 고소한 튀김 냄새에 이끌려 홀린 듯 들어간 작은 식당이었습니다. 메뉴판을 읽을 수 없어 옆 사람이 먹는 것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습니다. 이윽고 주인아저씨가 건네준 덮밥에서는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랐습니다. 비록 생각했던 음식은 아니었지만, 서툰 사람을 보며 웃어주던 눈빛이 말보다 따뜻해서였을까요. 남자는 낯선 튀김 덮밥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요리처럼 싹 비웠습니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온기가, 잔뜩 긴장해 있던 마음을 녹여주었습니다.
   남자는 길을 잃어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돌아가면 그만이니까요. 가본 적 없는 곳, 처음 딛는 길을 걷는 일은 오히려 설렘입니다. 마치 눈 내린 바닥에 발자국을 남기는 일처럼 말이에요. 버스를 잘못 타서 울 일도 없습니다. 신호등 불빛에 따라 멈추고 걷고, 차라리 멈춘 듯 느리게 주변을 살피는 일. ‘처음’이라는 단어로 포장된 벅찼던 며칠 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는데 시선은 들떠 늘 촉촉했습니다.
   하늘색이 유난히 짙었던 날. 구름 조각은 짜놓은 지도 같았습니다. 남자는 물집이 잡힐 만큼 걸으며 생각했습니다. 무엇을 버리기 위해 이토록 걷고 있는 걸까. 발이 아프고 어깨가 결려도 이상하게 마음만은 깃털처럼 가벼웠습니다. 열 시간 넘게 헤매던 거리, 평생 오지 않을 수도 있는 그곳에 무언가를 내려놓고 온 것만 같습니다.
   당신은 어느 계절에 살고 있나요. 혹여 매서운 겨울에 살고 있다 해도, 마음만은 가장 좋아하는 때를 지나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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