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와 무
청력이 돌아왔나 보다
보청기 없이 인사를 나눈다
남자의 손을 꼬옥 잡고
온기 없이 떨리는 살을 만진다
성급히 떠날 준비를 하는지
이미 가는 중인지
숨을 헐떡인다
혼자가 된 남자는 갔다
정오인지 늦은 새벽인지 모르게 갔다
떨림과 흐름이 사라졌다
이를테면 생의 증거는 영영 떠나버렸다
인기척이 사라진 남자는
숨을 푹 죽인 채 꿈꾼다
얼마나 차가웠을까
두려웠을까
그게 아니라면
잠시 생을 빌려 보러 온 거라면
익숙한 길에 반가웠을까
표정이 조금은 나아 보인다
결국엔 돌아가는 것을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세상에 이토록 작은 존재임을
먼저 간 발자국 위에 발을 포갠다
큰 자국에 작은 발
그만한 시간이 필요하자
나이는 그래서 먹나보다
홀로 지나는 길에
옛사람 만나며
고운 가루 이불을 덮는다
사월을 앞둔 그날 눈이 참 많이 왔지 경칩이 지났는데도 말이야 온통 한기로 가득했는데 함박눈은 희한하게 쌓이지 않았어 흰 배경을 쥐어 잡고 희고 흰 재가 되었네 오르막에 잠시 쉴 찰나 귀신같이 해가 솟았어 덕분에 쉬지 않고 따라갔어 원망하지 말라는 듯 뚝 그친 눈과 뜬 해가 기억나 모시기 참 좋은 날이구나 커다란 남자는 눈인 척 왔다가 작은 나무가 되었네
뒤돌아보지 말라는 말에 마지막 인사는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