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이 발을 기억하는 방식
   


   새 구두를 샀다.

   마음이 동해 덜컥 사버린 빳빳한 가죽이 발뒤꿈치를 붉게 물들인다. 걸음마다 욱신거리는 통증. 하지만 나는 안다. 낯선 통증도 길어야 일주일이라는 것을. 며칠 앓고 나면 죽은 가죽은 제 고집을 꺾고 내 발의 굴곡을 따라 순하게 숨이 죽을 것이다. 딱딱하던 것이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러니 문득, 신발 끈을 고쳐 매다 생각하는 것이다.

   가죽 하나 길들이는 일도 이리 금방인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은 왜 이토록 더디고 아픈가 하고.
   우리는 가끔 낯선 타인에게는 세상 더없는 예의를 차리면서, 정작 내 옆의 사람에게는 가장 무례한 얼굴을 하고 만다. 서로 얽히지 않았더라면 꽤 괜찮은 사람으로 기억됐을 우리가, 가까워졌다는 안도감을 핑계로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낸다. 차라리 모르는 사이였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이토록 날 선 말을 뱉어내진 않았을 텐데.

   어쩌면 사람의 인연이란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시절 인연(時節因緣)’의 섭리를 따르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죽고 못 살 것처럼 붙어 다니던 친구가 어느 날 계절이 바뀌듯 자연스레. 멀어진 기억이 있다. 다툰 것도 아닌데 연락이 뜸해진 사람. 돌이켜보면 그는 당시 나의 외로움을 채워주기 위해 내게 왔던 것이고, 소임을 다했기에 조용히 내 생에서 물러난 것일 테다.
   반대로 학창 시절 옷깃 한 번 스친 적 없던 낯선 동창을, 십수 년이 지나 밥벌이의 현장에서 다시 마주치기도 한다. 철없던 시절엔 서로 줄 것이 없었으나, 어른이 된 지금은 서로에게 기대거나 가르쳐 줄 무언가가 생겼기에 비로소 ‘시절’이 도래하여 만난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 상처를 주고 떠난 사람조차, 내게 사람 보는 눈을 키워주기 위해, 혹은 이만큼의 아픔을 견디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 잠시 머물렀던 스승이었을지 모른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시기를 품고 내게로 와서, 때가 되면 낙엽처럼 지거나 혹은 굳건한 뿌리로 남는다.
   내 마음 같지 않다고 너무 앓지 말자.

   귀가 있어 듣고, 눈이 있어 보고, 마음이 있어 느낄 수밖에 없다. 살아있기에, 감각이 펄떡이기에 타인의 무례함이 아프게 박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욱신거리는 마음을 안고서라도 이것 하나만은 기억하기로 한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만큼, 마음을 속절없이 낭비하는 일도 없다는 것을. 미움이라는 감정은 결국 내 안의 가장 귀한 풍경을 갉아먹고, 나를 가장 초라한 곳으로 데려가니까.
   일주일이면 발을 편안하게 감싸주는 구두처럼. 서로에게 편안한 바닥이 되어주기를. 설령 끝이 이별일지라도, 한 시절을 채워주었던 시간만큼은 따뜻하게 기억되기를.
   바람이 분다.

  새 신을 신고, 다시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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